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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1888년 런던의 미제 연쇄살인사건

by rafaella 2025. 8. 31.

1888년, 런던의 좁은 골목길을 배회하던 이름 없는 여성들의 죽음은 도시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가스등이 희미하게 비추던 화이트채플의 밤거리에는 정체불명의 살인마가 숨어 있었고, 그의 끔찍한 흔적은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라고 불렀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1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1888년 8월 31일, 경찰관 조나스 미젠(PC Jonas Mizen)이 매리 앤 니콜스(Mary Ann Nichols)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사건의 시작 – 1888년 런던 화이트채플

1888년 8월 31일 새벽, 런던 이스트엔드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매리 앤 니콜스(Mary Ann Nichols)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녀는 잭 더 리퍼의 첫 번째 공식 희생자로 기록되었으며, 목은 깊게 절단되어 있었고 복부는 끔찍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이 날은 단순한 범죄가 아닌, 역사에 남을 미제 사건의 서막이 열린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몇 주 동안 동일한 수법의 살인이 이어지며 런던 시민들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잭 더 리퍼’라는 이름의 등장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적으로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과 신문사에 여러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중 한 통에는 “나는 잭 더 리퍼다(I am Jack the Ripper)”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비록 이 편지가 실제 범인의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언론은 즉각 이를 대서특필했습니다. 결국 범인은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 중 하나인 잭 더 리퍼라는 정체불명의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블로흐의 단편 소설 『Yours Truly, Jack the Ripper』 (Weird Tales, 1943년) 일러스트
출처: Boris Dolgov · Weird Tales (1943) · Public Domain

캐노니컬 파이브: 알려진 다섯 피해자

학자들과 ‘리퍼학자(Ripperologists)’들은 잭 더 리퍼의 확실한 피해자를 다섯 명으로 보고, 이들을 캐노니컬 파이브(Canonical Five)라 부릅니다.

  • 매리 앤 니콜스 (Mary Ann Nichols, 8월 31일) – 첫 번째 희생자
  • 애니 채프먼 (Annie Chapman, 9월 8일) – 목이 절단된 채 발견
  •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 (Elizabeth Stride, 9월 30일) – 비교적 손상이 적어, 범인이 방해받았다는 추측
  • 캐서린 에드워즈 (Catherine Eddowes, 9월 30일) – 같은 날 발견,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
  • 메리 제인 켈리 (Mary Jane Kelly, 11월 9일) – 리퍼 사건 중 가장 참혹하게 살해된 피해자

범행은 점점 더 잔혹해졌고, 피해자들의 시신 훼손 방식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해부학적 지식을 가진 자의 소행이라는 추측을 낳았습니다.


수사의 한계와 경찰의 무능 논란

런던 경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범인을 추적했지만, 당시의 과학 수사 능력은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지문 감식도, DNA 분석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기에 증거는 대부분 소문과 목격담에 의존했습니다.

경찰은 수십 명을 용의자로 체포하거나 조사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언론은 매일같이 경찰의 무능을 비난했고, 시민들의 불신은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사건은 영국 경찰 역사에서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유력 용의자들과 DNA 논란

잭 더 리퍼 사건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용의자가 거론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폴란드계 이민자 아론 코스민스키(Aaron Kosminski)입니다.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고, 당시 경찰 기록에도 용의자로 언급된 인물이었습니다.

2014년, 피해자 유품에서 발견된 DNA가 코스민스키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샘플 오염 가능성과 분석 방식의 오류 논란이 이어지면서 학계는 이를 확정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외과의사, 화가 월터 시커트, 심지어 영국 왕실과 관련된 인물들까지 수많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범인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회적 배경과 언론의 영향

잭 더 리퍼 사건은 단순한 연쇄살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심각한 빈부 격차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스트엔드 지역은 범죄와 빈곤, 위생 문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로 방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범인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건은 언론이 범죄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입니다. 선정적인 기사와 삽화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부추겼고, 동시에 판매 부수를 크게 늘렸습니다. 언론의 힘은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사건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 데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잭 더 리퍼가 남긴 문화적 유산

130년이 지난 지금도 잭 더 리퍼는 대중문화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그는 ‘완벽히 정체를 숨긴 살인마’의 상징처럼 다뤄집니다. 심지어 학문적으로도 리퍼학(Ripperology)이라는 독자적인 연구 분야가 생겼습니다.

또한 사건은 범죄학과 연쇄살인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범죄 수사 기법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절감했고, 오늘날 프로파일링과 범죄 심리학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잭 더 리퍼 투어 간판 사진
출처: Pierre André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오늘날의 화이트채플과 잭 더 리퍼 투어

현재 화이트채플 지역은 런던의 역사적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잭 더 리퍼 투어’를 통해 당시의 사건 현장을 걸으며 설명을 듣습니다. 다소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범죄 관광이 아니라 19세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마무리하며

1888년 8월 31일, 매리 앤 니콜스의 죽음으로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은 단순한 미제 사건을 넘어 하나의 사회사적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보여준 빈곤과 불평등, 언론의 영향력,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은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1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묻습니다.
“과연 잭 더 리퍼는 누구였을까?”
답은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지만, 그 질문 자체가 역사를 잊지 않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