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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1923년) – 도쿄와 요코하마를 삼킨 대재앙

by rafaella 2025. 9. 1.

그날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평화롭던 일본 간토(関東) 지방은 거대한 굉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규모 7.9의 강진이 땅을 뒤흔들었고, 점심 준비 시간과 맞물려 도시 전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건물들은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고, 아비규환의 혼돈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덧없이 사라졌습니다. 관동대지진은 단순히 자연재해의 위력을 보여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혼란과 뿌리 깊은 차별이 결합하여 끔찍한 인적 비극을 낳은, 일본 역사상 가장 어두운 사건 중 하나입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폐허로 변한 도시 전경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폐허로 변한 도시 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진 발생의 순간과 도시의 파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사가미만(相模湾)을 진앙으로 하는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도쿄는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건축물의 대부분이 목조로 지어져 지진에 취약했습니다. 더구나 지진이 발생한 시간은 점심 식사 준비로 각 가정과 상점들이 불을 사용하는 때여서, 순식간에 수백 곳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번졌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도쿄와 요코하마는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지진 자체의 흔들림으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사망자의 90% 이상은 지진 후 이어진 화재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특히 요코하마는 항구 기능이 완전히 마비될 정도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도쿄 역시 수도 기능이 마비되면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피난민들은 불길을 피해 공터로 몰려들었지만, 불길이 거세지자 일부 공터마저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도쿄 혼조 의류창고(本所被服廠) 터에 모여 있던 약 3만 8천 명의 피난민들은 불길에 갇혀 단숨에 목숨을 잃는 참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학살, 유언비어가 낳은 비극

자연재해의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일본 사회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바로 근거 없는 유언비어였습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하고 약탈한다"는 식의 악의적인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일본 당국은 이 유언비어를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유포를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 정부는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고, 민간인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自警団)이라는 무장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이 자경단은 일본도, 죽창,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조선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본어로 발음하기 어려운 "십오엔 오십전(十五円五十銭)"과 같은 특정 단어를 발음하게 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구별했습니다. 발음이 어눌하거나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심지어는 자녀를 업은 여성이나 어린아이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우물에 던져지거나, 불길 속에 내던져지는 등 그 학살의 방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힘든 노동에 시달리던 빈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이들은 일본인들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나 진상 규명이 없어 정확한 희생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국 학계와 시민 단체는 최소 6,000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동안 누적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재난이라는 혼란을 틈타 극단적인 폭력으로 분출된 인재(人災)였습니다.

관동대지진 피해를 상징하는 전시물 (2015년 촬영)
관동대지진 피해를 상징하는 전시물 (2015년 촬영) 출처: 江戸村のとくぞう,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일본 사회와 정치에 남긴 흔적

관동대지진은 일본 사회와 정치에 깊은 상처와 동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정부 권력의 강화와 군국주의의 득세: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으며, 이는 훗날 일본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침략 전쟁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지진이 사회적 불안을 고조시키고, 정부가 이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전체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확산된 것입니다.
  • 도시 재건과 근대화: 파괴된 도쿄와 요코하마는 재건 과정에서 새로운 도시 계획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내진 설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도로와 기반 시설이 현대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잿더미가 된 도시가 역설적으로 일본 도시 건축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 사회적 불안과 소수자 차별: 지진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공동체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유언비어에 휩쓸렸으며, 그 분노를 사회적 약자인 조선인과 노동 운동가들에게 돌렸습니다. 이는 재난이 단순히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인권에 대한 중대한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

관동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을 넘어섭니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첫째, 유언비어와 혐오의 위험성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혐오와 차별은 언제든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국가의 책임입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 확산을 막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의 혐오와 폭력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셋째,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입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고 있는 역사적 문제입니다. 과거의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1923년 9월 1일은 자연의 무서움을 보여준 날이자, 동시에 인간의 잔혹함과 무책임함을 드러낸 날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재난 대비를 넘어선 사회적 책임과 인간 존엄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합니다. 평화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교훈 삼아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으로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