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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실종자의 날 – 사라진 이들을 위한 연대와 약속

by rafaella 2025. 8. 29.

사랑하는 가족이 아침에 집을 나선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전쟁터에서, 독재 정권의 감시 속에서, 혹은 분쟁 지역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진 이들의 부재는 단순한 개인의 상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8월 30일 세계 실종자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Disappeared) 은 바로 이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날입니다.

강제 실종, 그 정의와 법적 의미

세계 실종자의 날은 단순히 “사라진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국제사회가 강제 실종이라는 심각한 인권 침해를 직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국제적 약속을 상징합니다.

유엔의 ‘강제 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ICPPED) 은 강제 실종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 협약 제2조에 따르면, 강제 실종은 "국가 기관 또는 국가의 허가, 지원 또는 묵인하에 행동하는 개인이나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이 사람을 체포, 감금, 납치나 그 밖의 형태로 자유를 박탈한 후 이러한 자유의 박탈을 부인하거나 실종자의 생사 또는 소재지를 은폐하여 실종자를 법의 보호 밖에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즉, 강제 실종은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입된 체계적인 폭력입니다.  

이러한 법적 정의는 강제 실종을 ‘국가 폭력의 도구’로 규정하는 근본적인 전환점입니다. 협약은 광범위하거나 조직적인 강제 실종을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규정하며, 전쟁 상황이나 정치적 불안 등 어떠한 예외적인 상황도 이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명시합니다. 또한, 군대나 정부 당국의 명령이나 지시도 이 범죄를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으며, 가해자들의 불처벌(impunity)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 실종 범죄는 정치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아 범죄인 인도가 거절될 수 없습니다.  

협약은 피해자 보호에도 초점을 맞춥니다. 실종자와 그 가족에게는 실종자의 생사, 수사 경과 및 결과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와 함께, 물질적 손해배상뿐 아니라 존엄성 회복, 사회복귀를 포함하는 배상을 받을 권리가 주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역사 속의 비극, 현재도 이어지는 현실

세계 실종자의 날이 제정된 이유는 과거의 사건 때문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제 실종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현대적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이 비극의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과 저항의 상징, '5월 광장 어머니회'
출처 “Archivo Hasenberg-Quaretti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과 저항의 상징, '5월 광장 어머니회'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은 ‘더러운 전쟁’(Guerra Sucia) 을 통해 반정부 인사, 노동 운동가, 학생, 기자 등을 납치, 고문, 살해하고 그 흔적을 철저히 은폐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 라 불렀습니다. 칠레의 피노체트 군부 정권 또한 이와 유사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며 약 4만 명의 사망자 및 실종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이 비극에 맞서, 실종된 자녀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들이 모여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977년 4월 30일부터 매주 목요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에서 침묵 시위를 벌인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자녀들의 기저귀로 만든 흰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행진하며 국제사회에 문제를 알렸는데, 이는 군부의 공포에 맞선 가장 강력한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투쟁은 진실 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위한 사회 활동으로 확장되어, 자체 라디오 방송국과 대학을 운영하는 등 저항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들의 외침은 전 세계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80년대 한국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데사파레시도스’ 이야기는 우회적으로 광주의 아픔을 말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끝나지 않는 비극: 현대적 강제 실종의 양상

강제 실종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현대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강제 실종은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 북한의 납북자/억류자 문제: 북한은 6.25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국군 포로, 어부, 학생, 선교사 등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억류해왔습니다. 특히 국경과 인접한 지역에서 국가보위성, 국경경비대 등 국가 기관에 의한 실종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이는 체제 이탈을 막고 공포 정치를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국제앰네스티는 북한 정권이 이러한 강제 실종 문제에 대해 수십 년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 시리아 내전과 대규모 실종: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과 준군사조직에 의해 수만 건의 강제 실종 사례를 만들어냈습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시리아 정부가 강제 실종을 반인도적 범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에 연루된 관리들에게 비자 제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현대적 실종: 중국 정부는 신장 지역의 위구르족 등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시, 집단 구금, 강제 노동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유엔 보고서는 이러한 행위가 인도에 반한 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특히, 중국의 감시 체계는 안면 인식 기술과 강제 가구 동거 프로그램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잠재적 반체제 인사를 식별하며 '흔적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강제 실종을 보여줍니다.  
     

칠레 군부독재 시절 실종자 가족 모임 여성들이 사라진 이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
칠레 군부독재 시절 실종자 가족 모임 여성들이 사라진 이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 사진 출처: Kena Lorenzini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국제사회의 대응과 연대

강제 실종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 국제 인권 단체, 그리고 인도적 기구들이 각자의 역할에 따라 협력하고 있습니다.

  • 유엔의 법적 감시: 유엔 강제실종위원회(CED) 는 협약 당사국의 이행을 감시하고 국가 보고서를 심의하며, 개별 실종 사건에 대한 긴급 조치를 요청합니다. 한편,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은 협약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유엔 회원국을 대상으로 활동하며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 국제 NGO의 고발과 캠페인: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HRW) 같은 비정부기구(NGO)들은 직접적인 법적 집행력은 없지만, 강제 실종 사례를 조사하고 권위 있는 보고서를 발간해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특히 북한, 신장 위구르 등에서의 인권 침해 실태를 고발하고 구체적인 증언을 수집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알립니다.  
     
  •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인도적 활동: 유엔과 NGO가 법적, 정치적 접근을 하는 반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의 역할은 철저히 인도주의에 초점을 맞춥니다. ICRC는 150년 넘게 중앙심인국(Central Tracing Agency)을 통해 무력 분쟁이나 재난으로 헤어진 가족을 찾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들은 실종자의 생사 확인, 가족 재회 지원, 유해 발굴 및 인도 등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경감하는 데 주력하며, 법적 대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세계 실종자의 날은 단순한 추모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도 분쟁 지역과 억압 체제 속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 진실을 규명하고,
  • 책임자를 처벌하며,
  • 피해자에게 배상과 회복을 보장하는 것.  

작은 관심과 연대가 모이면 국제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8월 30일,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인권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사라진 이들을 위한 국제적 연대와 행동을 다짐하는 것. 그것이 세계 실종자의 날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이 비극이 종식될 때까지 국제사회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